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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 실험 071
ORB(김유자, 박정연), 시야(김예림, 문하영)

< 백야 >

2026.06.13 - 06.24
13:00 - 20:00


손 뻗는 파동들   /   김예림

세계는 가라앉는다. 각자가 눈뜨고 있는 한 아마도 영원히. 그러니 종말은 이미 오래전부터 아주
천천히 우리와 함께 걷고 있다.1 쉴 새 없이 벌어지는 비극은 모든 것의 최후가 도래하였다는
감각을 나직하게 전달하지만, 도시의 전광판, 건물 속 형광등, 손 위의 스마트폰, 그 수많은
이미지 사이로 평온하게 흘러가고야 만다.

≪백야≫는 현실 곳곳에 도래한 종말적 감각, 그 어둠에 무감각하게 하는 사회의 일면을 백야로
명명한다. 한여름 해가 지평선 아래로 내려가지 않아, 어둠이 보이지 않는 밤. 이 하얀 밤을 겪는
사람은 낮의 감각을 길게 연장할 뿐 지금이 밤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기 어렵다. 백야라는 장막은
빛이 꺼지지 않는 이 사회에서 종말이라는 시간의 걸음과 질감을 쉽게 놓치는 현재의 모습과
겹쳐진다.

전시는 ORB의 김유자와 박정연을 호출하여 백야의 감각을 복잡한 도시의 뒷면에 잠시
펼쳐낸다. ORB는 2024년 ≪어둠이 오면 내가 찾아가리라≫(합정지구)에서 미세한 진동으로서
현재의 종말과 그것을 감지하는 존재들의 삶을 보여주었다. ≪백야≫는 그 이야기를 이어 다시
한 번 발화한다. 2년여의 짧은 시간 동안에도 점점 더 빠르게 어둠으로 향하면서 더 깊이 무심한
세계를 목격하며, 문제를 다시 한 번 꺼내어 읽는다.

박정연은 사랑 고백의 노래 ‘세레나데’와 막간극 ‘인터루드’를 경유하여 빛으로 뒤덮인 도시와
개인을 드러낸다. 3채널 영상 < 세레나데(demo) >는 도시 구석구석의 쨍한 빛을 모으고, 긴
터널을 지나며 세레나데를 지어 부르고, 빛으로 수면치료를 받는 불면증 환자의 모습을 담는다.
찬가를 멈추지 않는 빛은 결국 우리의 일상을 침범한다. 그 빛에서 벗어나 잠들기 위해서 다시
빛에 기대야 한다는 사실은 우리가 백야의 바깥으로 쉽게 나갈 수 없음을 말하는 듯하다. 영상은
운송용 상자에 담겨 끝없이 번쩍이며 밤새 창문 너머 연인에게 날려 보내는 노래를 시각화한다.
어딘가로 옮겨지는 와중에 잠시 멈춘 듯한 상자는 부제로 덧붙인 ‘데모(demo)’와도 연결된다.
임시 버전의 가변성과 일시성은 불면의 원인이자 치료의 방식, 욕망의 대상이자 피로의 근원 등
다양한 의미로 도시 전반에 나타나는 빛의 특성을 보여준다.

빛이 밤새 두드리는 창문 너머에는 〈복수의 자매들: Interlude〉가 있다. 꺼지지 않는 도어벨
화면을 배경으로 외롭고 고립된 인물의 일화가 환상적인 사건과 교차되어 막간의 형식처럼 한
번씩 떠오른다.
‘복수의 자매들’은 그리스 비극에서 코러스를 담당하는 ‘복수의 여신들’에서 따
왔기 때문일까, 부유하듯 영상에 등장한 천사는 도어벨 화면 바깥으로 쉽게 응답하지 않지만 “길
잃은 모두에게 웅크릴 곳을 안내”하고,
“모두 여기에 있”는지,
“아니면 영영 떠났”는지 묻는다.
닿을지 알 수 없어도 떠도는 누군가를 향해 노래를 부르는 것만 같이.

김유자는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백야의 감각을 붙든다. 꽉 닫힌 호텔 천장에 붙어 바깥을
지시하는 하늘 모양 벽지, 윤곽만 드러나 위치와 표정을 알 수 없는 인물,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겹쳐진 교실 내부와 외부. 빛과 그림자가 뒤섞인 풍경은 흐릿한 경계의 감각을 공간에 흩뿌린다.
그 경계에서 김유자가 정지해 낸 장면은 역설적이게도 우리를 어떤 움직임으로 이끈다. 발을
떼어 조금만 자리를 옮기면 이동할 것 같은 창문의 잔상을, 떠오를 (지도 모르는) 인물의 정보를
떠올려보는 것이다. 막힌 자리에서 그 너머를 상상해볼 수도 있다. 그러다 유심히 바라보면
드러나는 파인 자국은 이것이 진짜 하늘이라는 믿음을 순식간에 바닥으로 떨어뜨리기도 할 것이다.
〈투명의 반복 D♭〉과 〈Barcarolle〉은 움직임을 보다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단추가 톡 하고 풀린
채 옷걸이에 걸린 토르소, 〈투명의 반복 D♭〉은 제목의 플랫 음처럼 반쯤 미끄러진 파동으로
공간에서 바람에 흩날리며 유영한다. 탄산에 잠긴 포크 주위로 기포가 보글보글 솟아오르는 작품
〈Barcarolle〉 또한 음악의 이름을 얻었다. 바르카롤은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뱃노래를 지칭한다.
흔들리는 파도에 맞춰 노를 저으며 부르는 노래를 떠올리며, 보이지 않는 포크의 손잡이를 쥐고
휘젓는 몸짓을 상상한다.

김유자는 전시를 준비하며 프레데리크 쇼팽(Frederic Chopin)의 바르카롤을 이야기한 적이 있다.
쇼팽은 연인 조르주 상드와의 여행을 약속하고 바르카롤을 작곡했지만, 사실 당시 상드와의
관계는 끝이 보이는 상태였다고 한다. 불과 몇 년 뒤 죽음을 맞이할 정도로 건강도 좋지 않았지만,
그는 여전히 어떤 꿈을 꾸었다. 자주 사용하지 않았던 “올림바장조로 시작해 그곳을 떠났다가
다시 밝고 환상적인 음으로 돌아오길 반복하는 음악”.2 〈Barcarolle〉은 어둠 속에서 눈을 감고도노래를 짓고 
부르는 의지를 담는다.

박정연과 김유자가 불러오는 노래라는 파동의 형식과 정서는 우리가 서 있는 백야라는 현실을
들춰내고 그 안에서 살아갈 가능성을 더듬는다. 누군가를 향해 노크하거나 존재를 묻는 것,
그리고 움직임을 함께 하는 것으로 절망을 살아내고자 한다. 두 작가의 메시지는 공간 한켠에
늘어둔 서신과 공명한다. 전시를 준비하는 동안 두 작가는 기획자 김예림, 문하영과 함께 각자의
단상과 안부를 묻고 전하는 글을 차례로 작성하였다. 각자가 어둠을 마주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펼쳐 놓은 뒤, 다음 편지를 작성하는 누군가의 글에서 돌아올 흐릿한 답장을 기다렸다. 바닥을
꺼내어도 이야기를 그저 듣고 반드시 찾아올 자신의 차례를 기다렸다. 서로를 향해 느슨하게
뻗은 손은 백야를 사는 한 가지 방법으로 시도되었다. 불안하고 아름다운 한낮은 지금 여기
눈앞에 자리하고 빛도 그림자도 벗어날 수 없으므로, 차라리 어둠을 직시하며 절망을 살아낼
가능성을 함께 모색하고자 하였다.

전시 홍보를 위한 짧은 글을 작성하며 나는 “눈꺼풀을 다시 한 번 움직이길 상상한다”고 적었다.
맺음이 다소 뻣뻣한 이 문장에서 움직일 주체는 나, 그리고 당신이다. 가만히 고개를 돌리고 누워
있는 날에도 눈꺼풀로 깜빡 창문을 내어보길 바라며. //


1 박정연, ≪어둠이 오면 내가 찾아가리라≫(합정지구, 2024) 서문.
2 김유자, 백야의 서신, 2026.



빛과 어둠과 빛  /  문하영

백야(白夜): 하지 무렵 고위도 지방에서 해가 지평선 아래로 떨어지지 않는 현상.

한낮의 태양 빛이 스러지지 않는 하얀 여름밤, 세상은 어둠을 제쳐두고 환하게 멈춰있다. 밤이
밤이 되지 않는, 어둠이 어둠으로 현상되지 않는 이 자연 현상은 동시대의 풍경을 닮아있다. 쉼
없이 발광하는 스크린 빛 속 눈 부신 이미지 더미 앞, 온 하루를 새하얗게 마비시키는 빛 아래
어둠에 대한 감각은 무뎌진다. ‘어둠’, 비극의 정동은 범람하는 빛 앞에서 무력하게 흩어진다.
방향성을 상실한 형광빛 긴장과 불안, 혹은 기묘한 낙관만이 잔상으로 남는다.

≪백야≫는 오늘날의 풍경에 대한 위와 같은 전제 위에 서서 ORB1의 김유자와 박정연을
초대한다. 김유자의 사진과 박정연의 영상은 새하얀 풍경 이면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세계를
또렷이 응시하고 서로 달리 작동하는 힘의 긴장을 증언한다. 더 정확히는 빛 속의 어둠을
마주하고 현상하는 일, 그리고 어둠 속을 살아가게 하는 빛을 길어 올리는 일을 한다. 전시는 두
작가의 시선에 기대어 백야의 면면을 펼쳐낸다.
박정연은 현대 사회에서 겪는 고립의 경험을 바탕으로 도시의 밤 속 보이지 않는 존재들과의
접속을 상상한다. 전시는 형형색색의 빛이 상자의 틈새를 비집고 발광하는 박정연의 영상 설치 〈
세레나데(demo)〉(2026)에서 출발한다. 섬처럼 단절되어 빛의 잔상으로만 연결되는 3채널의
영상은 저해상도의 삼원색 빛으로 각각의 상자 더미 위에서 현란하게 점멸한다. 첫 번째 영상 〈
세레나데(demo) I〉에서는 도시 빌딩 유리창에 반사된 해, 전광판, 건물의 지하, 가로등, 찻길 등을
출처로 하는 빛이 맹렬히 달린다. 두 번째 영상 〈세레나데(demo) II〉에서는 깜빡이는 눈처럼
빠르게 점멸하는 형광등 위로, 화면을 가로지르는 검은 줄의 플리커 현상이 춤의 파동을 만든다.
이에 감미로운 세레나데(serenade)가 발맞춘다. 박정연의 ‘세레나데’2가 찬미하는 대상은 어두운
밤 속 인공의 “꺼지지 않는 빛”, 잠을 자지 않는 여인이다. “빛나거라”라 노래를 띄워 보내는
화자는 그 빛에 열렬히 사로잡혀있다.

박정연의 영상에서 심야의 빛은 단순히 도시의 배경이라기보다는 실체를 지니고 도시 속 육신과
결부되는 존재다. 〈세레나데(demo)〉의 화자는 도시의 인공 빛을 향해 찬사를 보내고, 빛은
창문을 두드리는 그에게 기꺼이 문을 열어주고, 침범한다. 침범은 곧 그의 자리를 옆으로
밀어낸다는 것, 혹은 비집고 들어와 그의 자리를 점거한다는 것이다. 상자의 안쪽 벽면에
영사되는 세 번째 영상 〈세레나데(demo) III〉은 한밤 중 푸른 스크린을 앞에 두고 잠들지 못하는
얼굴과 수면 ‘치료’를 위해 붉은빛을 쪼이는 얼굴을 보여준다. 자신의 시간과 자리를 빛에 점유
당한 도시인의 이러한 불안정성은 포장되어 이동되기를 예정하고 있는 택배 상자와 그저
‘데모(demo)’라 덧붙여진 제목의 장치를 통해 강화된다. 〈세레나데(demo)〉는 빛의 침입, 교란과
그로 인한 소진됨과 그것의 추종, 즉 시련과 매혹 사이에서 유희한다. 찬미하기, 초대하기, 점유
당하기, 공존하기, 도피를 시도하기와 같이, 정처 없는 도시인들은 빛과의 숨바꼭질 속
황홀하고도 불온한 동거를 꾀한다.

〈세레나데(demo)〉의 건너편 유리창에 등을 대고 재생되는 영상 〈복수의 자매들: Interlude〉
(2025)는 도시의 밤 빛의 틈새에 부유하는 존재들을 소환한다. 영상은 현관의 모습을 송출하는
도어벨 화면으로 이루어진다. 플리커 현상으로 수평의 검은줄이 일렁임에 따라 매번 새롭게
갱신되는 화면에서는 이따금 강한 노이즈를 동반한 화면 하단의 텍스트만이 무성으로 소란하고
분주하다. 그 ‘자막’은 이 ‘극’에 대한 지문, 해설과 대사를 전달한다.
“어떤 조용한 여자가 그곳에 산다.” “모두가 그렇게 믿는다.” 유령과 개가 나타나고,
 천사는 집으로 가는 길을 잃고, 배달원이 나타나고 그는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는다. 
어느 누구도 나타나지 않는 서스펜스와 미묘한 낭만
속에서 오가는 분위기 속에서 언급되는 존재는 도시 전설과 실제의 문턱을 넘나드는 존재로,
도시의 인공 빛이 발광하는 찰나에 은둔하거나, 포착된 순간 손아귀에서 빠져나간다.
“한 사람을 빼고 모두 퇴장한다.” 그 한 사람은 숨은 유령처럼 이 모든 것을 목격하는 존재이자 ‘나’이다.
박정연의 영상 속 인물은 어둠 속의 빛을 매개로 바닥에 가까이 붙어 자신과 같은 존재들과 접속한다.

박정연의 작업이 지면에 밀착해 무게 중심을 아래로 만들어낸다면, 김유자의 사진은 흰 벽면과
공중을 오르내린다. 김유자의 필름 사진은 하나의 서사로 특정하거나 환원할 수 없는 괄호와
같은 장면을 만들어낸다. 박정연의 〈세레나데(demo)〉를 내려다보는 위치에 홀로 떠 있는 〈
구름이 더 모이면〉(2025)은 뭉게구름의 풍경을 포착하는 듯하지만 그저 끝없이 상승하는 듯한
착시를 주는 천장화 같기도 하다. 한편 이중노출로 만들어낸 꿈결의 잔상 같은 〈Will o’ the wisp〉
(2023/2024) 또한 단지 유리창 위에 겹쳐있을 뿐인 교실의 풍경과 버드나무 가지의 모습을
담는다. 빛을 투과시키면서 동시에 반사하는 유리창은 실내와 실외의 경계를 표면화하면서도
흩뜨린다. 서로 다른 벽에 단차를 두고 놓인 사진은 수수께끼 같은 유머로 연결되어 사진가의
힘인 지긋한 응시를 요청한다.
필름 카메라의 조건을 온전히 껴안은 〈말하는 사람과 듣는 얼굴〉(2022/2023)은 ‘충분한‘ 빛이
부족한 실내를 칠흑 같은 어둠으로 칠해내고, 빛이 들어오는 외부와 그것을 구획하는 사각의
창문만을 하얗게 빛낸다.
‘말하는 사람’과 ‘듣는 얼굴’의 주인은 아마 한 인물일 것이다. 분별할 수
없는 얼굴은 고개를 막 돌려 실체를 내어줄 듯하지만 그리하지 않을 고집스러움과 비밀스러움을
품고 있다. 카메라는 단 하나의 찰나를 정지 속에 가두지만, 김유자의 화면은 그 정지를 극적인
순간에 할애하기보다는 고요한 정지 속 내재해 있는 미세한 동세와 긴장에 내어준다. 그의
사진에는 대상에 대한 섬세한 응시와 셔터라는 사건의 전후를 상상하게 하는 힘이 자리한다.

작은 알루미늄 프레임 안의 사진 〈Barcarolle〉은 일상적이면서도 생경한 광경을 담는다. 투명한
액체가 담긴 그릇 안 포크가 잠겨있다. 포크는 가라앉고, 기포는 떠오른다. 상이한 방향을 가진
힘이 접시 위에 교차하고 그 순간을 포착한 화면에는 미세한 긴장이 어른거린다. 베네치아의
곤돌라 사공들이 부르는 뱃노래에서 유래한 장르 ‘바르카롤’은 낭만적인 풍경, 바람과 출렁이는
물결 위 서정적인 멜로디와 리듬을 노래한다. 〈Barcarolle〉의 포크는 노를 연상시키지만 그
수면은 일렁이는 대신 소곤하다. 차분히 잠겨있는 포크를 젓는 운동은 계속해서 유예될 것이다.
영원히 그 운동의 직전에 서서 대기하고 있을 것만 같은 장면이 제목의 이야기와 미묘하게
대립하는 음가를 만든다.

박정연의 상자가 펼쳐놓은 임시적이고 불안정한 속성은 김유자의 토르소로 이어진다.
마찬가지로 특정할 수 없는 〈투명의 반복 D♭〉의 인물 상반신은 얇은 시폰 위에서 그 육중할 수
있는 무게를 잃고, 천장에 매달린 옷걸이에 걸려 흔들리며 곧 거둬질 빨랫감이 된다. 김유자의
사진은 안으로 고여 들어가 부피감 있게 자리해있을 것 같으면서도 가벼운 움직임을 예비하는
감각을 펼쳐놓는다. 화면 내부와 외부의 경계를 교란한다. 풀린 하나의 단추는 그 틈으로 말을
걸고, 사진은 인물이 입고 있는 셔츠의 주름은 사진 자기 자신의 것으로 한다.

ORB, 김유자와 박정연은 빛과 어둠이 중첩되고 길항하는 풍경과 그 순간 발생하는 긴장을
응시한다. 서사와 현상의 완결, 확정, 봉합과 수렴을 보류하고, 풍경에 내재하여 보이지 않는
요소들과 그 경계를 불러와 흩뜨린다. 김유자는 흑백의 고요 속에서 빛과 어둠과의 힘겨루기와
힘 내어주기를 현시하고, 박정연은 원색과 흑색의 심야 속에서 빛에 침범받으면서도 매혹되는
일을 찾는다. 이는 무엇보다도 그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에 오래 머무는 시선을 기울이는
것에서 출발한다. ≪백야≫의 하얀 밤, 이들은 각각 바르카롤과 세레나데, 즉 말을 건네는 노래를
상상한다.

마지막으로 전시는 ORB의 김유자, 박정연과 큐레토리얼 컬렉티브 시야의 김예림과 문하영이
수개월 주고받은 서신을 20개의 〈백야의 서신〉으로 엮어낸다. 빛으로 덮여있는 불면의 밤은
서신을 통해 안부를 묻는 밤이 된다. 때때로 어두워져버린 서신의 더미는 그 주위를 둘러앉게
하는 밤의 모닥불이 된다. ORB의 2024년 전시, ≪ 어둠이 오면 내가 찾아가리라≫가 ‘종말’의
어둠을 감지하고 그 속에서 빛을 그려내기를 시도했다면, ≪백야≫는 다시 빛에서 출발해 어둠을
들추고, 그 틈에서 비집어 나오는 진정한 맑은 빛을 같이 길어 올려보기를, 함께 통과해 보기를
실험한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듣기 위해 눈과 귀를 기울이는 밤.
≪백야≫는 이렇게 다시 진정히 찬란할 빛을 상상한다. //

1 ORB는 심령현상 중 하나인 ORB현상에 착안해 만들어진 창작자 그룹으로, 사진과 영상을 주
매체로 사용하는 작가 2인(김유자, 박정연)으로 구성되었다. 미스테리하고 희미한 구체가
카메라에 의해 포착되는 현상을 지시하는 ORB처럼 불분명하다고 혹은 형태가 없다고 여겨지는
존재와 감각을 자유롭게 탐구하고자 한다.
2 작가에 따르면 영상의 가사는 작곡가 프란체스코 토스티(Francesco Paolo Tosti)의 가곡 ‘라
세레나타(La Serenata)’를 개사한 것이다. 이 곡에서 화자는 어둑한 저녁 사랑하는 여인이
잠들어있는 침실 창가에서 노래를 띄워보내며 노래가 여인의 마음을 여는 사랑의 전령이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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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최철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