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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 실험 062
《검은 동물과 흰 요정》
김채원, 이유진
2025.9.15 - 9.28
13:00 - 19:00

검은 동물과 흰 요정 
The Black Animal and the White Fairy

시간은 어떤 사람들을 위해서는 멈추어 준다. 그들을 위해 특별히. 영원의 시간. (…) 그들의 면모는 성스러운 아름다움, 계절의 부패를 모르는 아름다움을 상기시키는 것이 아니며,   피할 수 없는 것이나, 죽음도 아니고 죽는-것 자체를 상기시킨다.¹
차학경, 『딕테』


분절되어 살아 있을, 한순간도 완벽하게 살아 있지는 못할 몸들. 어쩌면 그쪽이 더 진짜 같다고, 영원히 들리지 않게 중얼거리듯 움틀거리는 손가락을 한 번쯤은 잡아줄 법도 했는데. 사랑받은 자와 사랑받지 못한 자. 사랑받은 손가락과 사랑받지 못한 두 다리. 다리를 바닥으로 쓸어가며 더듬으며 쓰는 기분, 그려내는 기분. 버림받은 채로 구원받은 기분을 아시는지. 

동시대의 신실재론 철학자 마르쿠스 가브리엘은 『예술의 힘』에서 인간이 만들어낸 물건들이 인간의 상상을 점령하고, 그것이 다시 인간 존재를 구성해 왔기에 인간 존재는 늘 인공지능이었다고 말한다.² 그리고 예술   그 자체가 우리에게 개선을 가져올지 멸망을 가져올지에 무심한 채로 인간을 지배하기에 “여러 예언가와 디지털 기술 성직자들이 두려워하는 슈퍼인텔리전스와 놀랄 만큼 유사한 위치를 점유한다”고 덧붙인다.³ 논리로 환원되기를 거부하는 신-기술-예술-인간의 굴레는 원초적 위험과 두려움의 감각을 자극한다. 따라서 이에 대한 사유의 과정은 죽음의 신 하데스를경유한다. 하데스는 그리스어로 Ἅιδης, 즉 보이지 않는 자the unseen라는 뜻을 지닌다.

갑작스럽게 마주한 산불이라는 재난은 이유진과 김채원으로 하여금 ‘보이지 않는 자’에 대한 감각을 날 세우게 했다. 이유진은 불탄 할머니의 집을 방문하고 산불 당시 상황을 묘사하는 어머니의 증언으로부터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바람을 타고 넓은 곳을 휩쓸고 다녔던 어떤 존재, 혹은 어떤 상태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작가는 할머니의 불탄 집터에서 재를 채집해 물감과 섞어 태운 나무 위에 그림을 그리고, 잔해가 되어버려 다시는 볼 수 없는 사물들을 기억 속 형태에 의존하여 도자로 빚어낸다. 불에 탄 흔적을 매개로 한 그의 작업은 보이지 않는 힘의 작용을 받아 새겨넣는 행위인 동시에, 그럼으로써 바람을 타고 이곳저곳을 휩쓸던 어떤 존재가 실재함을 증거하는 행위기도 하다.

김채원은 정상적이고 평준화된 신체와 같은 편향적 데이터셋에 기반한 생성형 인공지능 기술을 일종의 마법술로 호출하며, 그로 인해 지워진 몸들이 실재함을 드러낸다. 작가는 인터넷에서 수집하거나 직접 촬영한 파노라마 사진을 통해 결핍과 상해의 흔적이 담긴 이미지를 작업에 불러온다. 인터넷 이미지 속 불탄 동물이나 분절된 신체를 ‘어설프게 살려내는’ AI의 산출값은 전 지구적 차원의 자원 고갈과 착취의 한계 속에서 마술처럼 숭배되는 생성과 생산성에 대한 동시대의 강박을 증거한다. 이러한 되살리기의 시도는 고대부터 이어져 온 연금술적 상상에의 매혹이 인공지능에 대한 오늘의 광란 속에서도 여전히 작동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어설프게 재생되는 이미지들은 ‘그럴듯한’ 것에 대한 동시대의 집착을 증언하는 동시에, 그 안에서 선택받은 자와 선택받지 못한 자를 포개어 낸다.

불탄 것을 불탄 것으로, 어설픈 것을 어설프게 보여주는 두 사람의 작업에 내재한 이 반복은 사건을 복원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그 사건이 실재했음을 부인할 수 없는 방식으로 증거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작별이 이루어진다. 작별은 타들어 가도록 내버려두는 과정이자 남은 재를 보며 참 곱다 하고 중얼거리는 과정이다. 그 영원할 먼지들의 입자는 우리를 망각의 운명 속에서도 변형된 존재로 이끈다. 그렇게 예술은 작별의 형식을 통해 끝장내는 동시에 새롭게 시작할 힘을 준다.

글. 김지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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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차학경, 『딕테』, 김경년 옮김, 문학사상, 2024, 47쪽. 
2  마르쿠스 가브리엘, 『예술의 힘』, 김남시 옮김, ㅇㅣㅂㅣ, 2022, 16쪽. 
3  위의 책, 14쪽. 
4  위의 책,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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