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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분의 시>
이예란
2025년 2월 5일 - 2월 17일(휴관일 없음)
13:00 - 19:00

*전시는 오프닝 리셉션과 함께 2월 5일 17시 부터 진행됩니다.



✴︎ 자리 없는 것들의 시
예란은 지난 개인전 ⟪미끄러운 길에서 자세를 낮추시오⟫(공 간 파도, 2021.6.11.-6.22.)를 통해 자신의 노동 경험을 NPC 에 빗댄 바 있다. 아르바이트 현장에서 잘 알지 못하는 여러 사람들과의 일시적인 만남, 노동자에게 주어진 협소한 자리에 서 수행했던 노동을 NPC의 임무에 비유해 표현했다. 그는 일련의 노동 경험을 통해 생생하게 자신의 몸을 독립적인 존재로 감각하는데, 역설적이게도 노동 현장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서사가 뭉뚱그려지며 획일화되는 것을 느낀다. 이를 표현하기 위한 회화에는 흰 천을 뒤집어 쓴 이름 없는 존재, 즉 NPC가 반복적으로 드러난다. < NPC 연작 >은 시간이 흐를수 록 유화의 기름과 만나 점차 색이 휘발하는 영수증 종이가 사용된다. 이는 사회에서 초단시간 노동, 플랫폼 노동 등 시간과 장소가 점차 쪼개지며 일회적인 노동 주체의 시간을 암시 한다. 노동이 파편화되는 오늘날의 상황에서 휘발되는 시간은 어떠한 소속감을 만들어내기 힘들기 때문에 결국 노동 주체의 시간이 가벼운, 대체 가능한 상태가 되는 것이다. 

예란의 작업에서 시간은 그의 세계를 이루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전시 ⟪여분의 시⟫는 자신의 일상에서 지난한 ‘노동’ 을 뺀 나머지 시간을 이야기한다. 그림 속 존재들은 여전히 흰 천을 덮어쓴 채, 말이 없다. 간혹 비어있는 말풍선이나 문장 부호들로 이들이 우리에게 어떠한 말을 건네고 싶어 하는 것을 알 수는 있지만, 정확히 전달되지 못하고 흩어져 버린다. 또한 이들은 이주를 하거나, 도망을 가는 것처럼 어딘가에 정착되지 못하고 계속 이동하는 모습을 보인다. 예란은 이 불안정한 존재들의 시간을 기록하기 위해 분절의 형식을 시도 한다. 캔버스와 판넬은 틀(frame)과 컷(cut)의 역할로서 벽면으로부터 독립되는 구획의 기준이 되는데, 각각의 회화는 컷 의 배열에 의해 사건이 전개되는 만화처럼 연속적으로 나열되어 그 내러티브가 전개된다. < 이주_불불불조심 >(2024)에서 떠나고 있는 NPC들의 뒤로 비춰진 불타는 지평선은 < 마지막 동료 >(2024), < 부활 >(2025)의 공통적인 배경이 된다. 그림들 은 서로 연결되어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불타는 지평선은 종말하는 세계를 상징하며, 동시에 그들이 향하는 불확실하지만 희망적인 새로운 세계를 암시한다. < 그림자와 러브 레터 >(2024)는 두 개의 판넬로 구성된 작업으로, 한 개의 판 넬이 한 컷이 되어 개체적인 독립성을 가지는 동시에 긴밀하 게 연결된다. 이 때문에 우리는 이 고통스럽고 슬픈 존재들의 시간이 작품 안에서 무한히 지연되고, 반복되며, 이어지고 있음을 상상하게 된다. 


전시명 ⟪여분의 시 The Extra ( )⟫는 시(時)와 시(詩)를 뜻한다. 예란은 그간 쓰임의 자리가 주어지지 않은 것들을 재료로 끌어와, 내밀한 감각을 덧붙여 시를 쓰는 작업을 꾸준히 해왔다. 본래 있던 자리에서 이탈한 존재들은 주로 노동의 현장에서 발견되는데, 이 때 주변화된 존재들을 기록하는 것과 동시에 자본주의로 치환되는 시간에 대한 의문을 덧붙인다. 기록하기 위해 그리기와 시쓰기의 방법을 사용하지만, 이는 비효율적이고 비자본주의적 속성을 가진 행위로 시간이 곧 자본화가 되는 현실에서 미묘하게 겉돌게 된다.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음에도 기꺼이 기록하는 것에 시간을 쓰는 것은 자 본주의 리얼리즘(capitalist realism)*이 팽배한 시대에서 자조와 한탄보다 이 시간을 견디는 더 큰 힘을 가졌을지도 모른 다. “가끔 거대한 쓰레기장을 찾아가/그곳에 들어가면 개중 내가 쓸 만하다는 생각과/고향에 온 것 같은 안정감이 동시에 들어/사실 목적은/재료를 얻기 위한 것이지/무엇을 만들기 위한 것인지는 알 수 없어/그걸 알았다면 지금 나는 이런 삶에 굴복하지도/종속되지도 않았겠지”(「새것」)의 구절처럼 시를 쓰고 작업을 하는 작가로 살아가는 현실의 녹록지 않음을 토로하거나 “모든 다툼과 악감정을 초기화/그렇게 다짐하고 약속해요/모두 용서할 수 없는 지경이라도/연속적으로 상처가 생겨 더 이상 회복하지 못할지라도”(「여분 3」)의 구절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와 작업의 가치에 대한 낭만적 믿음 을 지속한다. 


* 마크 피셔는 ‘자본주의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보다 세계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이 더 쉽다’는 프레드릭 제임스와 슬라보예 지젝의 구절을 인용하며 자본주의가 망하고 새로운 대안 체제가 가능할 것이라는 기대가 사라진 현대 사회를 진단한다. 그가 제안한 ‘자본주의 리얼리즘(capitalist realism)’은 자본주의가 유일하게 존립 가능한 정치-경제 체계일 뿐만 아니라 이제는 그에 대한 일관된 대안을 상상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고 느 끼는 감각이다. (마크 피셔, 『자본주의 리얼리즘 - 대안은 없는가?』, 박진철 역, 리시올, 2018, pp. 11-12)


글 | 이유민
eumin10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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