ꄆ 미로 속으로 걸어 들어가며 ꄆ
✦ 자기 미로에서
도망자는 미로에 숨지 않아. 이미 우주가 미로인데, 구태여 미로를 세울 필요는 없잖아? 진정 숨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건물의 모든 복도들이 향하고 있는 망루보다 런던이 훨씬 좋은 미로야.* 따라서 자기 미로란 도망쳐 숨기 위함이 아니라 누군가를 유인하기 위함이야. 얽히고 설킨 복도 끝, 미로의 중앙에는 그 미로의 주인이 숨을 죽이고 가만히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어. 그렇기에 자기 미로는 스스로 지어낸 세계일지 몰라. 아주 조용하고 견고히 지어진 세계의 주인은 바로 미로를 만든 그 사람.
✦ 죽은 - 죽지 않는 거미
미로를 열어보지 않으면 그 안에 숨어있는 자가 죽은 자인지, 죽지 않는 자인지 알 수 없어. 일단 발을 내딛고 미로의 중앙으로 들어가야 해. 돌바닥에서 울려퍼지는 발걸음 소리, 갈수록 좁아지는 복도, 어둠이 죽음을 연상시키기도 하겠지만 말이야. 그러나 간혹 피부에 스치는 거미줄 따위가 죽지 않았음을 일깨워줄거야. 이런 자기 미로의 모순적인 성격으로 인해 그 안에서는 죽은-죽지 않는 거미가 될 수 있어. 이 곳에서는 죽었지만 죽지 않는 거미가 되어 집을 지어. 자기 미로의 존재를 정당화하는 것은 바로 거미야.
✦ 다시 자기 미로로
⟪자기 미로에서 죽은-죽지 않는 거미⟫라는 미로를 더듬어 읽는 일종의 규칙이 있다. 전시 공간을 부유하지만 서로 거미줄처럼 연결된 성다슬, 이안진, 이준희의 선명한 종이를 따라가면 된다. 세 작가는 본 전시 ⟪자기 미로에서 죽은-죽지 않는 거미⟫를 통해 종이 위 그려지는 드로잉이라는 매체를 천착한다. 또한 릴레이 드로잉을 통해 앞선 드로잉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자신의 장면과 이어보는 시도를 지속한다. 이 과정에서 직접적인 언어의 개입은 배제되는데, 한 작가로부터 출발한 이미지는 연쇄적으로 다른 이미지를 촉발하여 비언어적인 소통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릴레이 드로잉을 거치며 출현한 의도치 않은 요소들은 각자의 시각적 요소로 번역되는 과정 그 자체로 전시장에 놓인다. 이를 통해 완성된 회화의 견고함과 달리 가볍고 즉흥적인 드로잉의 열려 있는 성격을 실험한다. 이들은 궁극적으로 공동의 세계를 다시 쓰며 우연히 발견하는 비선형적이고 동시다발적인 이미지를 그리는데, 이러한 일련의 장면들이 집약되어 ‘자기 미로’로 구축된다.
전시 제목 ⟪자기 미로에서 죽은-죽지 않는 거미⟫는 보르헤스의 단편 소설 『자기 미로에서 죽은 이븐 하캄 알보크하리』로부터 기인한다. 알보크하리의 이야기는 두 친구의 대화를 통해 전개된다. 알보크하리는 자신의 사촌 사이드와 함께 사막의 부족을 약탈하고 통치하며 부를 축적해왔다. 그러나 부족이 봉기하여 도망치는 중, 사이드를 죽이기에 이른다. 그는 사이드의 유령이 쫓아와 자신을 죽일 것이 두려워 거대한 미로를 만들고 그 중앙에 자리를 잡는다. 그러나 사실은 알보크하리가 사이드였다는 것, 자기 미로는 스스로 숨기 위함이 아닌 알보크하리를 살해하기 위해 유인하는 장치였다는 점이 나타나며 이야기는 큰 반환점을 넘는다. 보르헤스의 소설과 같이 성다슬, 이안진, 이준희는 전시장을 착란적인 자기 미로로 변화시킨다. 세 작가는 자신의 작업 세계를 거미줄로 설정해 서로의 세계를 끈끈히 연결짓고 이 세계에 침투될 누군가를 기다린다.
성다슬은 상실의 경험으로부터 세계와의 연결점을 짓는다. 그 순간의 상황과 대상은 명료히 보존되는 것이 아니라, 소실되고 왜곡되어 뚜렷이 정의되지 않는 형상들로 그의 세계에 등장한다. 기억 속에 혼재되어 남아있는 다양한 동물, 사람, 유령, 천사의 이미지는 화면 위에서 뒤섞여 서로 연결되고, 새로운 서사로 변화한다. 이안진은 정상성이라는 사회의 이분법적 기준 바깥에 미끄러지고 탈락된 존재들의 대안적인 이야기를 그린다. 나방 날개를 단 인간들, 갈비뼈가 드러난 꽃과 같은 이야기 속 존재들은 위계적인 규범이나 질서 없이 서로에게 귀를 기울이고, 사랑하며 아름답고 불안한 세계를 다시 쓴다. 이준희는 인간과 비인간 사이에 있는 형상들을 통해 초현실적 세계를 만든다. 그의 세계 속 존재들은 분명한 이름이나 특성 없이 빌려 입고, 꾸미며, 가장하는 방식으로 나타나 서로 불화하거나 화합한다. 이들은 성스러움과 키치함, 우울과 기쁨 등의 이질적인 요소들의 사이에서 표류하며 탐험하는 이야기를 쓴다.
성다슬, 이안진, 이준희의 드로잉에는 반복해서 나타나는 모티프가 있다. 성다슬의 집·통로·떼로 걸어가는 형상들, 이안진의 나방·궤적·눈알, 이준희의 태양·산·별과 같이 각자의 종이 위에 그려져 왔던 확연한 도상들의 이야기는 확대, 이탈, 연결 등의 방식으로 서사를 뛰어넘는다. 종국에는 세 작가의 종이 위에 모두 등장해 이야기는 무한히 확장하는 세계를 구축한다. 유연하게 침투하고, 집요하게 참견하며 세계의 익숙한 배경 속 기묘하지만 낯익은 내러티브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각자의 모티프와 뉘앙스는 종이라는 매체를 넘어 뒤섞이고 새로운 세계를 다시 쓰는 주인공이 되어 자기 미로 안을 배회한다.
------------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2012, 『알레프』, 송병선 역, 민음사, p.167
글 | 이유민
eumin100@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