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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 실험 053
< Ending, Fleeing, Surviving >
< 끝내기, 도망가기, 살아남기 >
이이난, 이한나. 김제희
2024. 12. 15 - 12. 27
13:00 -19:00


‘Ending, Fleeing, Surviving(끝내기, 도망가기, 살아남기)’은 잭 할버스탐의 책 『실패의 기술과 퀴어 예술(The Queer Art of Failure)』에서 가져왔다. 
이러한 제목은 작은 존재들에 주목하여, 경계를 교란하고자 시도하였던 이이난, 이한나 두 작가의 시도들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늘 우리 주변을 머물고 있지만, 쉽게 지나쳐 버리고 눈길을 받지 못했던 존재들을 집중적으로 들여다보기를 시도한다. 
그 과정에서 이렇게 도처에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던 작은 것들이 내재하고 있던 다양한 층위의 심상과 감각을 환기하고자 한다.

이이난은 두 개의 신작을 통해 전해지지 못하고 실패한 채 흩어져 버린 말, 언어에 집중하여 그것을 전시장으로 끌어들인다. 
< 수풀과 자갈 >(2024)은 작가가 2년간 네덜란드에 사는 친구와 써서 부친 편지가 도착하지 못하고 사라진 경험에서 시작된 작업이다. 
편지가 사라진 후 상실감을 느낀 작가는 그때의 상황을 상기하며, 전시장에 놓인 흙으로 만든 자갈과 종이로
만든 수풀을 헤치면서 만들어 낸 파동이 시공간을 넘나들며 서로에게 닿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에서 이 작업을 제작하였다.

< 실패하는 말들을 위한 상자 >(2024) 역시 관계를 이어 나가며 네가 내가 아니어서, 내가 네가 아니어서 명확히 전달할 수 없었던 감각과 시간을 담아 상자로 만들었다. 
특히 이 상자는 자연에서 얻은 송진(rosin)과 밀랍(beeswax)의 재료를 통해 제작되었다. 
송진은 소나무 스스로가 자신을 치유하고 보호하는 목적에서, 밀랍은 벌이 벌집을 짓기 위해 목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어쩌면 < 실패하는 말들을 위한 상자 >는 실패를 담보하고 있기에 시도하지 않았거나, 
시도했음에도 실패한 상황과 감각들을 보존하는 작가의 새로운 살아남기 과정이 아니었을지 추측해 본다.

이한나의 < 옷이 없는 사람 >(2024), < 스트레칭 >(2024), < 쌀알 기둥을 만들며 기다린 너는 어디로 갈지 모른다 >(2021, 2024)는 실에 감긴 철사들을 공통으로 볼 수 있다. 
작가는 닮아 있어 비슷하지만, 똑같지는 않은 구불거리는 철사와 기둥은 모두 자신을 형상화한다고 말했다. 
그것은 몸을 늘려 어디로든 가고자 하는, 그리고 그 장소에 있으면서 작은 것들의 목격자가 되고자 하는 그의 열망을 대변하고 있다.

이한나가 관찰한 나방과 파리지옥과 같은 작은 곤충과 은행잎 등의 형상도 반복하여 등장한다. 
작가는 이런 것들을 집중하여 찾는 것이 아니라 ‘어쩌다’ 발견하였다고 말한다. 전시장 내부에 작게 놓인 자연물은 실제의 것이 아니라 작가가 직접 만든 것이다. 
작가는 관람객이 이 공간을 관찰하며 ‘어쩌다’ 이것을 발견하게 되길 바란다. 
그리고 근처에 있는 연약한 기둥이 사실은 이 작은 것들을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도 상기해 주기를 요청한다. 
연약하고 작은 것과 함께하는 이한나의 태도는 사고의 전환을 이끌면서 새로운 차원의 살아남기를 요구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는 어떤 대상에 대해 작업할 때, 항상 그들과 자신의 공통점을 찾아내고 연민을 느끼기 때문이다.

할버스탐은 죽음, 실망, 실패와 같은 부정적인 상황에 직면하였을 때 그것을 우회하는 길을 찾기보다, 유한하게 받아들이고, 부조리한 것, 유치한 것, 
가망 없는 멍청함을 포용하라고조언하였다. * 
유연함과 포용이 때로는 끝내고, 도망가고, 살아남기 위한 가장 안전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이번 전시에서 이이난, 이한나 두 작가 역시 지금까지 그들이 경험한 살아남는 방법을 펼쳐내었다. 
이를 통해 《Ending, Fleeing, Surviving》은 그들이 마련한 작은 시도의 물결들이 파도가 되어 관람객에게 와닿기를 희망한다. 
그 맞닿음이 우리에게 도망쳐서 살아갈 동력을 제공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감히 이이난과 이한나 두 작가의 시도가 관람객들에게 다가가 닿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글을 함께 부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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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잭 할버스탐, 『실패의 기술과 퀴어예술』, 현실문화, 2024, p. 373.

글. 김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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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오동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