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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 실험 044
< 덮는 회화 덮인 회화 >
박벼리, 최현희
2023년 10월 9일 ~ 2023년 10월 21일


≪덮는 회화 덮인 회화≫에서는 동진 시장을 비롯한 도시 곳곳에서 발생하는 ‘도시재생’의 모습을 회화를 통해 이야기한다. 2019년 ‘전통시장 연계형 도시재생사업’ 후보지 6곳 중 하나로 선정된 동진 시장에는 재생을 앞둔 흔적이 자리 잡고 있다. 이제 동진시장에는 공간 파도를 포함한 단 세 곳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시장 내외부에는 출입 금지 안내문부터 빨간 스프레이로 커다랗게 그려진 X자 표시들, 사람의 손길이 언제 마지막으로 닿았는지 모를 짐과 쓰레기들이 발견된다. 이것들 사이에 공간파도의 화이트 큐브는 더욱 생경하다. 이런 아이러니함이 도처에 깔린 도시는 생기고 사라지기를 반복하며 재생을 기다린다. 그리고 회화에서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방법 중 하나는 재료들을 물리적으로 쌓아 아래층을 덮거나 지우는 것이다. 이 ‘덮는 행위’는 계속해서 변화하는 도시의 모습을 비유한다.

하나의 레퍼런스를 가지고 
박벼리는 계속해서 화면을 쌓아 올리듯이 작업하고 최현희는 그려낸 이미지를 지워나가듯이 작업한다. 작업 과정에서부터 차이를 드러내는 두 사람의 ‘덮는 행위’는 우리가 재생과 반복을 겪는 도시의 과정에 있음을 보여준다. 두 사람은 공간 파도가 위치한 동진시장과 성미산로 거리에서 도시재생의 흔적을 수집하고 공유한다. 이 흔적을 박벼리는 누군가의 어설픈 시도이자 앞으로 변모할 시작점으로, 최현희는 흔적이 생겨난 과거부터 현재까지 시간의 흐름이 느껴지는 종착지로 보인다. 두 사람은 같은 좌표를 제목으로 한 회화로 짝을 이루고 ‘다른 시간-같은 장소’라는 차이를 직접 촬영해 출력된 이미지로 아카이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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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간 파도가 위치한 동진시장은 서울에 본격적으로 근대화가 추진되던 1970년대에 문을 열었다. 동진시장이 50여 년간 연남동에 자리하는 동안, 정부는 이곳을 여러 차례 도시개발의 대상으로 선정했고, 상인과 시민들은 청년층의 유입을 도모하는 사업을 추진하는 등 낙후된 시설과 침체된 상권을 되살리려는 노력이 여러 방면에서 이루어졌다. 시도 와 실패의 반복을 거치고 지난 9월, 마포구는 동진시장 시장정비사업 추진계획을 발표하며 지금의 시설을 대체할 현대적 인 유리 건축물의 조감도를 공개했다. 박벼리와 최현희가 동진시장에서 발견한 것은, 덮고 덮이며 되풀이되는 생성과 소멸이었다. 

 《덮는 회화 덮인 회화》에서 박벼리와 최현희는 동진시장에서 마주한 도시개발의 순환구조를 캔버스를 덮는 붓 질의 언어로 풀이해 펼쳐 보인다. 이들은 동진시장을 각각 답사하며 촬영한 이미지 중 4장을 공동의 출발점으로 두었다. 동일한 이미지를 박벼리는 시간이 축적된 층으로, 최현희는 부재를 증명하는 흔적으로 해석하고 캔버스를 덮어 나갔다. 유리창에 붉은 스프레이로 크게 그어진 ‘X’자의 이미지를 박벼리는 새로이 덧붙여진 물질로, 최현희는 긁어낸 자국으로 드러냈다. 반려견을 찾는 전단지의 이미지에서 박벼리가 숫자의 레이어를 발견했다면, 최현희는 상실을 호소하는 문장에 주목했다. 전봇대를 두르는 전단지의 이미지를 박벼리는 부착물의 더미로, 최현희는 찢긴 자국으로 표현했다. 이처럼 회 화는 각각 얹어내려는 붓질, 지워내려는 붓질로 완성되며 두 갈래의 방향성을 보인다. 이는 동진시장이 겪어온 쇠락, 재 개발, 중단, 철수, 조성 등의 논의를 환기하는 동시에, 오브제를 쌓아내는 방식과 뜯어오는 방식이 양립했던 누보 레알리 즘 작가들의 작업을 연상시키며 도시 경험을 조형적으로 재해석한 미술사적 선례와도 연결된다. 

 아카이브는 박벼리와 최현희가 동진시장에서 포착한 이미지들로 구성되며 촬영 위치와 촬영자에 따라 분류된 다. 이는 동진시장을 전반적으로 보여주는 자료이기보다는 두 작가가 이동한 경로와 목격한 대상을 종합한 기록에 가깝 다. 이번 전시에서 아카이브는 두 갈래의 회화가 균형을 이루고 나란히 전개되도록 하는 중성적인 구심점으로서 기능한 다. 촬영 위치의 좌표는 자료의 제목이자 그림의 제목으로 제시되면서 한 쌍의 회화가 같은 지점, 동일한 이미지에서 출 발했음을 명시한다. 이때 아카이브라는 형식의 중성성이 작업의 정서나 조형을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균일한 상태로 만든다. 나아가, 아카이브는 공간 파도의 전시공간과 동진시장의 현장을 연결하는 중간지점의 역할을 한다. 지도의 형태 를 띤 아카이브를 통해 관객은 전시에 놓인 회화와 현장의 중간 단계를 상상해보고, 그 현장을 직접 찾아갈 수 있다. 관객 은 전시 기간 동안 비치된 점 스티커를 시장과 전시장에 붙이며 자신만의 답사를 기록할 수 있는데, 이는 또 다른 기록자 의 좌표가 되어 확장된 아카이브를 상상해볼 수 있게 한다.  

 이번 전시는 박벼리와 최현희가 한 장소의 시각적 요소들을 매개로 사회적 현실에 다가간 첫 번째 시도였다. 지난 작업에서 박벼리는 스티커 등의 인쇄물을 소재로 화면에 레이어를 쌓는 실험을 진행해왔고, 최현희는 시간이 갈수록 흐려지는 흔적의 물성을 구현해왔다. 두 작가가 동진시장을 걷고, 촬영하며 도시의 큰 조류를 조감하기보다는 그 안에 놓 인 한 지점을 들여다보고 관찰하기를 택한 것은 회화의 표면을 탐구해왔던 기존 작업 방식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 다. 이들은 작업을 진행하며 동진시장의 현 상황에 미술계에 발을 딛고 서 있기 위해 버티고 있는 신진 작가로서의 감정과 경험을 대입해보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렇게 미시적인 관점에서 출발해, 사회 현실과 공감하고 개인적인 언어로 풀어 낸 것은 현 청년 세대가 사회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과 맞닿아있다. 전시를 위한 과정을 거치며 박벼리는 작업의 도약 지점에 올랐고, 최현희는 돌파구를 찾은 것 같다고 이야기한다. 이 지점에서 다시 뚜벅뚜벅 걸어 나가며 두 작가는 또 다른 생성과 소멸을 준비할 것이다. 다시, 캔버스 위에서.

글. 박혜정.